김대건 아홉 번째 서한 전문( 4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1-08-12 21:08 조회1,41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한왕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나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처음에 도둑의 두목으로서 주위의 지방들을 착취하였는데 도당의 수가 많아지자 왕권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즉 한왕)의 명예를 구하기 위해, 처음에 달단에 많이 존재하던 작은 왕국의 하나였으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확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기원이야 어쨌든 그는 벌써 명조 말엽에, 중국의 황제가 크게 두려워할 만큼 세력이 강해졌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중 하나인 마력 제(萬曆帝)[86] 은 한 왕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그의 나라들을 위협하는 몽골인들과 싸우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한 왕에게 그의 군인 중에서 정병(精兵)을 보내주도록 청하였습니다.
정병들이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자 그는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죽이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얼굴이 잘생겨 한 관리의 관심을 끌어 그의 하인이 되었다가 주인의 신임을 크게 얻고 그 집의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른 관리 하나가 이 관리를 방문하러 왔다가 이 달단 청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기 동료에게, 이 금지된 사람을 살려 주고 있으니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관리는 자신이 처분할 것이니, 우선은 연회를 즐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이 말을 엿들었습니다. 그는 앞날이 염려되어 마부에게 중대한 임무가 생겼다고 말하며 주인의 말 중에서 제일 좋은 말을 골라 안장을 얹어 놓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말이 준비되자 그는 말에 올라타고 한 왕에게 황제의 배신과 동료 군인들의 불행한 운명을 알리러 백두산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습니다. 분개한 한 왕은 그의 10명의 아들 중 맏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미 중국인들이 조선인들로부터 탈취한 요동의 수도 봉천(奉天,즉 漕陽)을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왕자는 봉천에 도착하자 적의 숫자에 놀라 대항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비겁함에 몹시 화가 나서 그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는 가족과 모든 신하를 이끌고 봉천으로 갔습니다. 성문이 열렸고, 그는 봉천을 왕도(往都)로 삼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황궁의 두 내관, 즉 왕과 ‘두(TOU)’라는 사람이 만력의 후계자인 숭정제(崇賴帝)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그 자리에 다른 황제를 뽑아 앉혔습니다. 숭정은 절망한 나머지 매산, 의 한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숭배합니다. 그들은 그 나무가 황제의 죽음으로 성화 되었다고 말합니다.
숭정 황제 자리에 앉힌 사람은 ‘추앙왕(Tchouang-wang,關王)’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경솔하게도 한 유력한 관리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그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상귀(Ou-sang-koui,吳三桂)’ 란 이 관리는 그 강탈자를 추격하기 위해 봉천의 새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추앙왕’은 겁이 나서 남쪽 지방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1644년) 교활한 한 왕은 자기의 둘째 아들 순치(顧治)를 보내 북경을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달단 만주 왕조(즉 청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치는 강희의 아버지인데, 강희제의 치세 동안 한때 중국 전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할 희망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다소간 천주교를 박해한 그의 후계자 옹정, 건륭, 가격, 조광 황제들의 치세 아래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행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정월 20일(양력 1844년 3월 8일) 경원의 조선 관장이 이튿날(양력 3월 9일)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훈춘으로 보냈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우리, 즉 저와 저의 동행은 서둘러 시장으로 갔습니다. 읍내 어귀에는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손에는 흰 손수건을 들고 허리띠에는 붉은 색깔의 작은 차 주머니를 차고 군중 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조선 밀사들이 우리를 알아보도록 약속된 표였으며,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접근하라는 표였습니다.
우리는 읍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날 약속을 어긴 것일까?’ 하고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말에 물을 먹이러 읍내에서 300보 떨어진 개천으로 갔을 때, 우리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누군가가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중국말로 말을 걸었으나 그는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말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韓)이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 이제 성공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그의 동료들한테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들은 4명이었는데 한 달 이상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가엾은 교우들은 슬픔으로 낙담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의 대화에서 풍기는 이상한 분위기가 외교 인들의 호기심을 끌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이야기에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것같이 보였을 때 우리는 우리 종교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몇마다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가축 흥정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받겠소?” “80냥이오.” “너무 비싸오. 자, 50냥 줄 터이니 당신 짐승을 주시오,” “80냥 이하는 절대로 안 되오.” 이렇게 우리는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이 교우들로부터, 조선 교회가 박해 이후 상당히 평온하고, 많은 수의 교우들이 박해의 위험이 덜한 남쪽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며, 여러 가족이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교우들이 서양 선교사를 그들의 집에 오래 숨겨두는 것이 어렵겠지만 천주님의 자비를 믿고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북쪽으로의 영입은 한 국경에서 또 다른 국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 외에 나라 전체를 통과해야 하므로 변문 쪽이 덜 위험할 것이라는 등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는 하직의 표로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그들은 흐느껴 울었고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는 다시 읍내로 들어가서 군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경원 시장은 우리에게 이상한 풍경을 제시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은 도착해서 즉시 그들의 상품을 늘어놓을 권리가 없었고 신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이르자 사람들이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을 쳤습니다.
그 순간 성급한 군중이 밀집하여 광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조선인, 중국인, 달단인 모두가 뒤섞여서 각기 자기 나라말을 하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소란한 소리가 근처 산에서 메아리쳐 왔습니다.
그들은 4〜5시간밖에는 장사를 못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왕래, 싸움, 주먹질, 무장 약탈 같은 것이 경원을 시장이 아니라 습격당해 약탈당하는 도시처럼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외국인들에게 돌아가라는 신호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같은 무질서 속에 철거가 시작됩니다.
군인들은 그들의 무기로 낙오자들을 밀어냅니다. 우리는 그 혼잡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훈춘으로 돌아가려 하였을 때 조선 교우들이 다시 우리한테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작별할 결심을 할 수가 없어서 우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저의 동행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말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포졸들이 우리를 장사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온 사람으로 의심할까 두려워 그에게 다시 말에 오르라는 신호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조선 교회의 수호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기도에 우리를 의탁하며 두만강을 건너 달단 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는 길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먼저 미끄럼 타며 왔던 강의 얼음은 한창 녹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들은 불어나 잡동사니와 묵은 나뭇등걸들과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을 떠내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은 마차들을 가지고 여전히 도착하고 있었고,
그래서 강가들이 혼잡했습니다. 그들의 소리와 맹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강물의 요란한 소리와 뒤섞여 이 골짜기를 무시무시한 광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위험 속으로 감히 모험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해마다 많은 사람이 얼음 밑에 깔려 죽는다고들 합니다.
저는 우리를 그곳까지 인도해 주신 천주님의 안배에 위탁하고 건널 수 있는 데를 찾아 강을 건넜습니다. 제 동행은 좀 더 신중하게 안내인을 데리고 아주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우리가 잃은 것이란 우리 말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주교님께 인사 올리며,
주교님의 지극히 순종하고 지극히 부당한 아들 안드레아 김해 김.
조선부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