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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동정 순교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2-08-09 10:16 조회869회 댓글0건

본문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 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성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성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 대성당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성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와 함께

 그녀를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글...천주교 부산교구 "오늘의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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