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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무 작성일23-10-19 09:24 조회194회 댓글0건

본문

17세기에 프랑스 예수회원들은 북아메리카의 선교에 정열을 쏟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인디언 휴런 족이 사는 지역에서 열심히 선교하였다. 

그들은 세인트로렌스 강과 북미의 5대호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북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는데 

특별히 1642년부터 1649년 사이에 8명의 예수회원이 인디언들에 의해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르네 구필 : 르네 구필은 1642년 9월 29일에 북미에서 최초로 순교하였다

그는 1608년 프랑스의 상 심포리온에서 출생하였다. 외과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나 1639년 3월 26일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난청 때문에 고생하다가 결국 예수회를 퇴회하였다. 

퇴회 이후에는 ‘도네’라는 하는 예수회를 돕는 평신도 협조회원의 일원이 되어

계속해서 예수회원들의 선교 사업에 관여하였다. 

선교사를 돕는 평신도 협조회원들은 예수회원과 똑같이 장상에 순명하고 

무보수로 일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1940년 예수회원들과 퀘벡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 설립된 병원에서 

한동안 일하였으나 인디언들과 보다 가까이 생활하고 싶다는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1642년 이사악 조그 신부가 휴런 족의 선교를 도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퀘벡으로 왔다. 마침 구필은 의사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판단되었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타고 선교지로 향하던 그들은 8월 2일, 

약 70여 명의 모호크 족 사람들에 의해 습격을 당했다. 

체포된 후 그들은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잘리고 이가 빠지는 고문을 당했다. 

 

모호크 강을 따라 끌려가던 도중, 구필은 다시 예수회의 평수사로 입회하기를 

청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그 신부의 허락을 받고 예수회원으로서 허원하였다. 

오세르네논(현 뉴욕 주의 오리스빌)에 도착하여 그들은 갖가지 혹독한 고문과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구필 수사는 인디언 아이 한 명에게 

십자성호를 알려주었다. 이것이 그 아이의 삼촌에게 알려지자 

그 삼촌은 달려와서 구필의 목을 쳤다. 구필 수사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 : 1607년 1월 10일 프랑스의 오를레앙에서 출생하였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1632년 1월에 서품을 받은 조그 신부는 그해 7월 2일 

퀘벡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모호크 족에 의해 습격을 받기까지 

약 6년간 휴런 족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했다.

 

조그 신부는 구필 수사가 순교한 이후에도 약 1년 넘게 노예로서의 삶을 

계속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데 성공, 

현 미국의 뉴욕 시에 해당하는 뉴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1644년 다시 선교를 위해 퀘벡 지방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모호크 족을 위한 선교를 위해 준비하였다. 1646년 10월 17일, 오세르네논에 

당도하기 직전 조그 신부와 동료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모호크 족의 족장이 개최한 연회에 가던 도중 잡혀서 도끼로 맞아 순교하였다. 기념일 10월 19일.

 

* 이들의 선교활동과 순교를 그린 영화 가 1991년에 제작되었다.

* 최초의 3명은 현 미국 뉴욕 주의 북부에 위치한 오리스빌에서 모호크 족에 

의해서 순교했고, 나머지 5명은 휴런 족이 이로코 족에 의해 습격당했을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최초의 3명은 미국의 순교자 명단에 그리고 나중의 5명은

캐나다의 순교자 명단에 들어 있다.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는 1601년 5월 27일 프랑스의 디프에서 출생하였다. 

법률을 공부하던 중 성소를 받고 1621년 10월 1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루앙에서 실습기를 보내고 있을 때 누벨 프랑스(퀘벡 지역)에서 온 휴런 족의 

젊은 유학생과 만나면서 장차 휴런 족을 위한 선교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1631년 파리에서 서품받고 잠시 프랑스에서 교사로 일했다.

 

1632년 다니엘 신부는 퀘벡 지방으로 향했다. 잠시 케이프 브레톤 섬에서 

봉사한 후 퀘벡의 휴런 족 마을로 들어갔다.잠시 동안 브레뵈프 신부로부터 

휴런어를 공부했고 634년부터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였다.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10년 넘게 휴런 족을 위해 성실히 봉사했다. 

1648년 7월 4일, 이로쿼이 족이 휴런 족을 습격하였다. 

다니엘 신부는 휴런 족을 안전하게 교회 안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교회 문 앞에서 저항하였다. 습격자들은 다니엘 신부를 총과 화살로 사살하고 

유체를 잔인하게 찢은 다음 교회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던져버렸다.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원하였다. 그러나 사제직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몸이 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1617년에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퀘벡 주로 떠났으며, 

주로 인디언 휴런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캐나다로 온 이후 그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34년 동안이나 전교활동을 개척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벡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 때 그도 쫓겨나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63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선교사들이 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와중에도 인디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가 잠시 퀘벡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와 가장 적대적이던 이로쿼이인디언들로부터 체포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약 7천 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휴런족을 위해 프랑스어-휴런어 사전과 그들의 언어로 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성 요한과 더불어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 공경을 받고 있다.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와 함께 이로쿼이 족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선교 협력을 하던 휴런 족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여러 가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손톱이 뽑히고 손가락은 절단되었으며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진 채로 밖에 세워졌다. 

또한 코와 입술이 잘리고 불에 달궈진 쇠사슬이 그들의 어깨 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세례를 빗대어 펄펄 끓는 물을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았다. 

3월 16일 , 그는 동료 순교자들을 마지막까지 격려하며 숨을 거두었다.

 

동료 랄르망 신부의 고문은 브레뵈프 신부가 순교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랄르망 신부에게도 끓는 물을 붓고 손을 자르고 눈을 빼고 불타는 장작을

그의 입에 처박는 등 잔혹한 고문을 계속했다.

최후에 그들은 그의 혀를 절단하고 심장을 꺼내서 구워먹었다.

랄르망 신부가 순교한 것은 3월 17일이었다.. 

랄르망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카롤루스 가롤로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런족 인디언 마을이 

적대적인 이로쿼이족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도록 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하였다.  

가롤로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요한 드 라랑드 프랑스 디에프 출신인이며 일찍이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가 

그곳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신도 보조자가 되었다. 

1646년 그는 성 이사악 조그를 수행하여 이로쿼이 인디언 지역을 여행하다가 

모호크족들에게 체포되어 뉴욕주의 알바니 교외 오세르네논에서 

참수치명 당하였다. 요한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동료 예수회원 7명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노엘 샤바넬 프랑스의 망드 근교에서 출생한 성 노엘 샤바넬은 

163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1643년에 캐나다 뉴 프랑스의 휴론 인디언들의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에타리타의 인디언 마을에서 성 카롤루스 가르니엘신부의

보좌로 활동하다가, 이웃 마을인 생트 마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배교자 인디언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노엘 샤바넬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가브리엘 랄르망은 1630년에 예수회원이 되어 외국 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건강은 늘 좋지 못하였다. 2년 동안 캐나다 퀘벡에서 사목한 후 

그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합류하여 인디언 휴런족 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할 즈음에 이로쿼이족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사제가 포로가 되어 생 이나스까지 호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몸서리치는 고문을 받았는데 브레뵈프 신부는 몇 시간 내에 

운명하였으나, 아주 묘하게도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그날 밤은 넘겼지만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랄르망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냐시오의 벗들, 2015년 4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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